2010년 02월 10일
산책
한참을 키보드 앞에서 머리를 긁적이다가 결국 옷을 따스하게 차려입었어.
이대로 있어봐야 나아질 것 같지 않았거든.
얼마 전에 산 검은색 바지와 검은색 와이셔츠, 그리고 검은색 퍼 코트에 군대에서 가지고 나온 검은색 장갑을 끼고 예전에 샀던 검은색 운동화를 신었어.
그렇게 나가려니까 온통 검은색이라 한 밤 중에 조금 위험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.
가뜩이나 내 얼굴도 거짓말로도 하얗다고 할 수 없는데 말이야.
그래서 검은 색 와이셔츠를 벗고 하얀 색 와이셔츠로 갈아 입었어.
검은색 퍼 코트는 그대로 입었지. 흰 색 코트도 있지만 그건 오리털 코트라서 날씨가 제법 따뜻해진 지금은 좀 더울 것 같아서 입지 않았어. 또 아직 한 두 번 밖에 입지 않은 옷들을 입어주는 게 예의이기도 하고.
문을 잠그고 캄캄해진 골목으로 나갔지.
골목을 비추는 주황색 가로등의 불빛이 물기 적신 공기에 예쁘게 녹아나고 있었어.
이어폰을 귀에 끼려다가 지금 이대로가 더 좋은 것 같아서 다시 구깃구깃 주머니에 넣고 발걸음을 옮겼지.
오늘은 지금까지 걸어본 적이 없는 길을 걷기로 했어.
우선 늘 다니던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이 아닌 반대편의 길을 택했어.
근처에 산이 있어서 좀 가파른 길을 걸어올라갔어. 연달아 이어지는 주택가들, 복잡한 골목들, 간혹 불이 아직 켜진 집도 찾아볼 수 있었어.
저 멀리 차도에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 왔고 그리운 찹살떡 장수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지.
집에서 10분 정도 걸었더니 주택가 한 가운데 떡 하니 있는 구멍 가게를 발견했어.
깜빡깜빡하는 가로등 밑으로 구식 자판기가 서있는, 마치 먼 옛날 과거의 한 순간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 같은 구멍 가게였지.
신기했어.
그리고 그 순간 내 마음은 무척이나 두근거렸지.
갑자기 어린 아이가 된 것처럼 주위의 모든 게 내 마음을 잡아 당겼어.
모든 게 새로웠고 내 호기심을 자극했지.
평소에는 아무 것도 아닐 살짝 무너진 담장이, 벽에 알 수 없이 휘갈겨져 있는 글씨와 그림이, 아직도 녹지 않고 한 구석에 쌓여 있는 눈얼음이, 모두 여럿의 이야기를 지니고 나를 흔들어 놓았어.
넌 무슨 얘기를 지니고 있니?
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카메라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고 사방을 훑으며 걸었지.
그렇게 한참을 걸었어.
차갑고 촉촉한 밤공기의 내음과 차박차박 땅을 적시는 내 발걸음 소리.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들.
나는 그것을 벗 삼아 걸었어.
괜시리 술도 마시고 싶어지고 또 춤도 추고 싶더라고.
차가 지나지 않는 차도의 한 복판을 한참을 걷기도 하고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번화가도 지나고 이제는 머리 속에 그리던 지도가 삐뚤삐뚤 해져서 여기가 어딘지 모르게 되었을 때,
작은 공원에 그네 하나를 발견했어.
그네에 앉지는 않았어. 그냥 그 옆에 서서 차가운 그네의 줄을 쥐고 있었어.
괜히 웃음이 떠올랐지.
그리고 다리가 아프다는 걸 깨달았어. 시계를 보니까 한 시간도 더 지나 있더라고.
돌아가야지 생각했지. 많이 늦었으니까.
하지만 돌아가는 길도 같으면 재미 없잖아?
이번에도 모르는 길로 그냥 방향만 맞춘 채로 걸었어.
오다가 와이셔츠 한 벌에 900원에 세탁하는 세탁소도 발견했고, 그리운 오락실도 발견했어. 또 예쁜 옷을 진열해놓은 가게도 봤고 밤이 늦었는데도 어딜 가는 건지 모르는 고양이도 만났어.
그 고양이도 나처럼 마음이 뒤숭숭해서 산책을 나온 거였을까?
그 생각에 말을 걸어봤는데 힐끗 바라보고는 도도하게 걸어가버렸어.
멀어지는 고양이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걸었지. 별 볼 것 없는데 괜시리 가보고 싶은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막혀서 되돌아 나오기도 하며 걷다 보니까 이내 아는 길이 나왔어.
집에 거의 다 온 거였지.
그때부터 걸음이 무거워졌어.
미용실, 빵집, 약국, 편의점, 유치원.
그리고 집.
비밀번호를 누르고 텅 비어 있는 집에 들어왔어.
다녀왔습니다.
신발끈을 풀으며 말했지. 예전 아버지가 그러셨거든. 아무도 없는 집이더라도 나갈 때와 돌아올 때는 언제나 인사를 하는 거라고.
그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나는 늘 누가 있건 없건 인사를 하곤 했어.
아, 졸립다. 자야겠어.
내일은 또 다른 길로 가볼까?
# by | 2010/02/10 04:06 | 미분류 | 트랙백 | 덧글(0)



